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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현황

"농촌과 도시가 함께 자라고 행복해지도록 입장농협이 함께 합니다"

지역현황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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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기도와 충청북도 3도경계에 위치한 곳임.
서울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평택.안성 I.C에서 평택방향으로 오시면 1번 국도가 나옴 → 여기에서 천안방향으로 약 5분이면 성환읍이 나옴 → 34번국도 진천방향으로 약 8분정도면 우리지역이 나옴 → 경부선 천안 I.C에서 우회전 하시면 단국대병원 방향으로 약 15분 거리에 있음.

 

우리 지역은 해방전 금이 많이 나던 곳으로 연속극 노다지 인생 배경을 입장지역으로하여 많은 사금이 나덧 곳으로 토질속에 금의 성분이 함유된 곳임.

 

한편 차량선맥의 끝자락인 성거산, 위례산, 서운산 기슭에 위치한 준령한 지역으로 땅은 사질토로 되어 있으며 거봉포도 재배에 적합한 최고의 기후조건과 연평균 강우량이 700mm 미만으로 당도가 높고 품질이 좋은 거봉포도 생산에 적합하며 전국 최대의 거봉포도 생산 주산지로 30년의 역사가 되었으며,

 

입장에 거봉이 전래된 것은 1968년 입장면 독정리 박문용 선생께서 일본에서 개량된 3배체 거봉묘목을 구입하여 재배 전파되기 시작하였음.

 

또한 기미 독립만세운동이 전국 최초로 시작된 곳이기도 하며 이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임.

 

이곳은 서울/대전등 대도시와 인접한 지역으로 지리적 교통의 요충지로 생산된 포도.배등을 도시소비자와 현지직거래 및 관광 농업을 겸한 유리한 지역임

(포도 : 1,000 ha / 배 : 100 ha / 미곡 : 560 ha)

 
입장면 연혁
천안군 2읍 10개면의 하나로 본래 직산군 이동면(二東面)과 삼동면(三東面) 지역으로, 이동면의 사장동(沙場洞), 기로촌(耆老村), 상장리(上場里), 하장리(下場里), 홍천동(弘泉洞), 동계리(東溪里), 효아촌(孝兒村), 구덕리(九德里), 신대리(新垈里), 양대리(良垈里), 시랑리(侍郞里), 도장리(道壯里), 당곡리(堂谷里), 호계리(虎溪里), 복덕리(福德里)의 15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지방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삼동면(三洞面) 하리(下里), 연봉리(延峯里), 우지곡리(于只谷里), 산정리(山井里), 차중리(次中里), 흑암리(黑岩里), 차상리(次上里), 토산리(土山里), 가좌동(可座洞), 용두리(龍頭里), 강당리(講堂里), 적정리(赤井里), 신두리(新頭里), 독정리(獨井里), 발림리(發林里), 도낭리(道郎里), 가연리(加連里)의 17개리와 경기도 안성군 입장면(笠場面)의 신흥리(新興里) 일부와 간곡면(干谷面)의 구정리(九井里) 일부를 병합하여 안성군에서 편입 된 입장면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천안군 입장면이 되어 도하, 연곡, 산정, 흑암, 가산, 용정, 신두, 독정, 도림, 유리, 기로, 상장, 하장, 홍천, 효계, 양대, 대장, 호당, 신덕리의 19개리를 관할하였다.
그 후 1963년 1월 1일 천안읍과 환성면이 천안시로 승격되므로 천원군 입장면이 되었섰다.
1989년 1월 1일(천안군 조례 1084호 1988.12.31) 도하리를 성환읍에 편입시키고18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동쪽은 경기도 안선군 서운면과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남쪽은 북면과 성거읍, 서쪽은 경기도 미양면과 서운면에 접하고 있다.
입장면의 입(笠)자는 본래 (笠)라는 설도 있다.
그 후 1991년 1월 1일 천안군으로 명칭변경, 1995년 5월 10일 천안시.군 통합으로 천안군을 천안시로 명칭변경하였다.
 
전설
위례산(전설)

어쨌든 전쟁과 관련이 많은 이 산에 또 하나의 기이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백제가 공주에 수도를 정하고 있을 무렵 어느 임금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날로 남침해 오는 고구려의 군사를 막기 위하여 왕은 이곳 위례산까지 와서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전쟁을 독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백제의 임금은 용왕(龍王)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신하여 온갖 재주를 다 지닌 분이었다. 그렇기때문에 왕이 이곳에 올때는 용(龍)으로 화(化)하여 공주에서 위례산 용샘까지 땅속 물줄기를 타고 단숨에 왔다고 한다.

그 때 백제의 국경선은 이곳까지 밀려와 고구려 군대는 틈만 있으면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왕은 산마루에 화살막이를 큰 돌로 만들어 세우고 그곳에서 백제군을 지휘했다.
백제왕은 천연적(天然的)으로 유리한 이곳의 지형을 이용하고 온갖 조화를 부려 고구려 군사들이 침입해 올 때마다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야말로 고구려 군사들은 날로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수천명이 넘게 죽어간 것이다.
고구려군은 그래도 계속 이 위례산을 쳐들어왔다.

그것은 고구려가 이곳을 점령하면 지금의 천안까지 고구려의 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이곳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려 그대로 물러 설 수는 없었다.
고구려는 처음에는 500명씩 군사를 보내어 위례산을 공격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군사를 투입시켜도 고구려군은 계속 패하기만 했다.
백제군이 승리를 거듭하는 것은 두말 할것도 없이 백제 임금이 이곳까지 와서 여러가지 조화를 부려 전쟁을 지휘 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제(百濟) 임금은 이처럼 날마다 새벽에는 용으로 변하여 공주에서 이곳 용샘으로 나와 전쟁을 지휘하고 밤에는 공주로 가서 낮에하지 못한 정사(政事)를 살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는 날로 강한 나라가 되고 있었다.
그간 두려웠던 고구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던 어느 날이었다.
이날도 백제왕은 새벽에 위례산(慰禮山)으로 군사를 지휘하러 간 날이었다.
왕실에서는 날마다 낮에는 어디론가 갔다가 밤에만 나타나는 임금을 이상하게 여겼다.
특히 불만이 많던 처남(妻男)은 동생인 왕비에게 임금이 간곳을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왕비는 자기 오빠에게 임금은 사람이 아니라 용(龍)이라는 말을 했다.

가뜩이나 왕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왕의 처남은 임금을 죽이기로 작정했다.
임금의 처남은 용이 좋아한다는 제비를 잡아 낚시밥으로 만들어 가지고 임금이 용으로 되었다가 사람이 되어 나오는 강가로 갔다.
마침 해가지고 어둠이 강가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임금이 돌아 올 시간이었다.
왕의 처남은 낚시를 강물에 던져놓고 용이 와서 물기를 기다렸다.

백제의 임금은 용(龍)이 되어 공주(公州)로 되돌아 오고 있었다.
하루종일 산성(山城)에서 소리를 지르며 전쟁을 지휘한 까닭에 그는 피로한데다 시장끼까지 느껴졌다.
그때 마침 용이 가장 좋아하는 제비가 보였다.
그는 너무도 배가 고팠기 때문에 얼른 그것을 물었다.
그러자 왕의 처남(妻男)은 힘껏 낚시대를 당겨 용(龍)을 낚았는데 그 용은 우성면 동대리 마을에 가서 떨어져 죽었다.
그뒤 용이 썩는 냄새가 너무나 지독하여 이곳을 구린내라고 전한다.

한편 용을 낚은 장소를 지금도 조룡대(釣龍臺)라고 전하며 임금이 죽은 이튿날 위례산 전투에서는 백제군이 패하고 말았다.
백제군은 무릎을 꿇고 통곡을 했다.
이처럼 싸움에서 지고 울었다 해서 이 산을 위례산(慰禮山)이라 했다고 전한다.

 
위례성(慰禮城)

입장면 호당리(虎堂里)에는 백제군(百濟軍)이 고구려군에게 패하고 울었다는 위례산(慰禮山)이 있다.
위례산 둘레에는 지금도 옛날을 말해주는듯이 백제의 성터가 남아 있다.

한편 위례산정(慰禮山頂)에는 용(龍)이 놀았다는 용샘이 있는데 이 용샘은 공주(公州)까지 뚫려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고 서해(西海) 까지 이어졌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서 샘바닥이 보이고 지름이 5m정도 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샘이지만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서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산마루에는 전쟁 때 백제 임금의 화살막이를 했던 3m정도의 높은 돌이 꽂혀 있고 동남쪽으로 내려오면 말구유로 쓰였다는 큰 돌이 두쪽으로 깨어진 채 있으며 동쪽으로는 어느 장군이 시험하기 위하여 돌에 주먹질을 하여 주먹모양으로 파진 바위가 있다.
입장면과 북면 경계에 있는 산이며 높이 524m이다.
토석혼축으로 쌓은 둘레 1696척 높이8척의 성채가 현재도 있고 그 안에 큰 우물(용샘)이 있다.
백제시조 온조(溫祚)가 그의 형 비류(沸流)와 함께 유리왕을 피하여 남쪽으로 와서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이곳에 각기 도읍하였다.

그때따라 온 신하가 오간(烏干) 마려(馬黎)등 열명의 신하가 되므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비류가 미추홀의 수토가 맞지 아니하여 도읍하지 10년만에 그 신하를 데리고 위례성으로 와서 합하게 되여 지역이 좁으므로 B.C14년에 한산으로 옮겨 백제가 되었다 한다.
1989년 5월 서울대학교 박물관팀이 일부 발굴하여 본 결과 백제 초기의 기와, 토기, 창촉, 철낫류, 노승 무늬토기가 출토 되었다.
이 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선조 말에 사방 5리를 일인에게 광권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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